지구별 여행자 - 류시화
여행을 떠나며 이번에도 챙겨둔 류시화 작가의 책 ‘지구별 여행자’. 투어 일정이 없는 한가로운 오후를 맞이하며 썬베드에 누워 책을 펼쳤다. 오늘은 어떤 재미난 일화를 만나게 될까? 기대한 책의 날개 안쪽에는 다음 문구로 시작한다.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은 시집이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훗, 작가님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첫 문장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와 책을 덮어버렸고, 여유 시간이 생겨도 사흘 동안 책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교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5p)
보리수나무 밑이 그곳이고, 기차역이 그곳이고, 북적대는 신전과 사원이 그곳이었다. 사기꾼과 성자와 걸인, 동료 여행자들이 나의 스승이었다.
때로 삶으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명상이고 수행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들은 시집이었다.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책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것은 시간과 풍경으로 인쇄되고, 아름다움과 기쁨과 슬픔 같은 것들로 제본된 책이었다.
저자의 인도 여행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예약은 뒤바뀌고, 약속은 간단히 무시되고, 음식을 주문해도 엉뚱한 요리가 나오기 일쑤다. 이런 장애물 피하기 경주 같은 인도를 왜 좋아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만난 강도의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다른 날강도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을 수 있는 동네를 말이다.
머릿속에 불이 났기에 인도에 갔다는 작가는 여행의 길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여행 중일 때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38p)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콜카타에 골프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쳐올린 골프공이 필드에 떨어지면 원숭이들이 집어가서 다른 곳에다가 떨어뜨려 경기는 지연되고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영국인들은 새로운 골프 규칙을 만들었다. ‘원숭이가 골프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 경기를 진행하라’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그 골프 경기에서 삶 또한 그렇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의 계획대로 다 조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좌절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원숭이가 골프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여행을 계속하라는 것이오.”
원숭이가 경기를 방해할 때마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여행 중에 예측하지 못한 일들과 부딪치는 일이 싫어서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여행지에서의 실수를 줄이는 것을 선호한다. 내가 찾은 정보가 틀렸거나 완벽하지 않을 때마다 과거의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며 곧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여행을 하며 여행을 배운다는데 아직 너그러운 마음으로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그 자리에서 여행을 계속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올드 시타람 여인숙(49p)
고풍스럽다는 뜻보다는 오래되어 형편없이 낡았다는 의미에 가까운 ‘올드 시타람 여인숙’에서 저자가 묵을 때의 일이다. 배정받은 방은 저자보다 먼저 투숙을 시작한 커다란 쥐가 방을 돌아다니며 배낭과 스웨터에 구멍을 내고 샤워기는 하늘을 향해 물을 뿜는 샤워실을 갖추고 있었다. 빨아놓은 빨래는 도둑맞는다.
불만을 늘어놓는 저자에게 20년 넘게 여인숙을 운영해 온 주인은 말한다.
“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소. 한쪽은 언제나 불평을 해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쪽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늘 즐겁게 지내는 사람들이오. 당신은 지금 인도 여행을 하러 이곳에 온 것이지, 불평하러 온 것은 아니잖소.”
그제야 저자는 옥상에서 일광욕까지 즐기며 잘 지내는 다른 투숙객들이 보였다고 한다. 단돈 50루피(850원)를 내고 묵으면서 유독 불평이 많았던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이 어떠한가 보다 그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깨달았다.
부처 아닌 체하기(195p)
깨달음을 얻기 위해 푸나의 아쉬람을 찾았지만 깨달음의 길은 멀게만 느껴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진전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어느새 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고 생각하던 때 스승의 한 마디가 잠을 깨우게 된다.
“그대여, 더 이상 부처 아닌 체하며 살지 말라!
잠든 사람은 깨우기 쉽지만 잠든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가 없는 법이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그는 계속해서 잠든 척하고 있기 때문에 깨울 수가 없다."
"그대여, 차라리 깊이 잠들라. 아니면 자신이 이미 깨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대가 부처가 아닌 체 행동한다면, 누구도 그대를 부처이게 할 수 없다.”
스승의 불꽃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영혼으로 파고들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환희의 감정으로 물결쳤다. 마침내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하지만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친구를 만나고 바가지요금을 요구하는 릭샤 운전사를 만날 때마다 기분이 상하며 부처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대는 언제까지 그렇게 부처가 아닌 체하며 살아갈 것인가!”
자유 - 다른 사람들이 세워 놓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252p)
영적인 나라, 깨달음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떠난 첫 인도여행에서 저자는 ‘노 프라블럼’의 나라가 아니라, 단지 ‘노 프라블럼’이란 단어가 자주 쓰이는 문제투성이의 나라에 불과했다고 한다. 더럽고 혼란스럽고 믿을 수 없고, 전혀 대책이 서지 않는 그런 나라.
여행을 계속하면서 지저분한 먼지 밑에서 반짝이는 보석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무질서 속에서 거대한 삶을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질서를 차츰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깨달음이란 심오한 경전이나 가르침, 특별한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찾아 방황하는 그 순간들 속에 어디에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당신의 삶이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을 소란스러움과 친교로 채우기보다는 평화로움과 인상적인 대화, 진리에 근접하는 경험들로 채우려 한다면, 마땅히 인도로 갈 일이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릴 일이다. 진정한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세워 놓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나는 자유라 부른다. 나는 이 여행에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아쉬람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였다가 이유 없이 잘난 체하고, 그다음 순간에는 두려워하고, 행복한 체하지만 돌아서면 고독감으로 가슴이 뚫려 있던 여행자, 다름 아닌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각 장소마다의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쉽지 않은 여행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두운 방 안에서 자신과 씨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대신 아열대의 태양이 떠 있는 눈부신 세계 속으로 걸어 나갔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어두운 방에서 나와 눈부신 세계 속으로 걸어 나가 자신을 찾아간 저자의 여정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