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는 종종 들르던 교보문고의 한 코너, 가판대를 수북이 가득 채웠던 책으로 기억한다. 2021년 10월에 초판이 발행되었으니 벌써 두 해가 지나갔다. 그때는 손길이 가지 않았는데, 어느 블로거의 추천이 생각나서 책을 집어 들었다.
선생님에 관하여 잘 알지 못했기에 큰 기대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화요일마다 진행한 인터뷰를 책으로 담았다는 소개를 읽고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연상되며 호기심은 더욱 줄어들었고 같이 구매한 책들 가운데 가장 늦게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하지만 인터뷰 속에서 선생님의 말씀은 여러 번 내 생각의 틀을 사정없이 깨 주셨다. 어린아이처럼 사고하는 것을 강조하시며 어른들처럼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든여덟 해를 사셨는데도 당신의 생각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어렴풋이 기억하는 작은 TV화면 속의 굴렁쇠 소년을 연출하신 분이셨고 디지로그라는 말을 만드신 분이었다니.. 겉표지의 '시대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인터뷰이기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20여 년 전 모리를 만났을 때에는 죽음 앞에 한껏 호기로웠다면 세월이 흐른 지금 죽음이라는 그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진다. '오늘이 그날이니?'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았던 20대의 그때보다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나를 감싸기도 했다.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고 Philippe Ariès는 말했다(죽음앞의 인간). 의식주를 위해 돈을 앞세우는 이 시대가 죽음을 감춰버린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 시점은 당장 몇 분 뒤가 될 수도 있다. 명백한 사실이지만 나는 한동안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무슨 주제든 생각을 깊게 하기가 어려웠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약간의 갈증을 느낄 때마다 소방 호스로 물을 마시고 있어서(도둑맞은 집중력) 좀처럼 깊이 있게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설 연휴와 여행 등으로 시간을 지내면서 금방 책과의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의 책이 나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내 머리로 하는 생각(39p)
열이면 열, 백 명이면 백개의 다른 생각이 있는 거지. 투표결과에 만장일치가 많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럴 거면 왜 민주주의를 하나? 왕이 다스리고 신이 통치하면 되는 거지.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독서하기(43p)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네.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꽃 저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표 외울 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저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을 닳도록 읽고 또 읽어.
존재론과 철학(89p)
영화에서는 인과 관계를 한 번에 관찰할 수 있네. 안타깝지만 실제 인생에서는 쉽게 관찰할 수 없어. 원인이 많으면 어떤 게 결정적 원인인지 모르거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인지능력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네. 존재해도 감각적으로 파악을 못하는 거지. 그게 존재론이야. 있는 줄 알아도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반대로 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느꼈던 것.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것도 내일이면 다 변하고 없어져.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라는 구절도 있잖나. 그래서 유한한 인생을 사는 우리는 질문해야 하네.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건 무엇인가? 풀리건 안 풀리건 그 문제를 붙드는 게 철학이라네.
어느 날 갑자기, 영원한 불변의 진리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전공을 바꿔 철학을 진지하게 공부해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의 나는 왜 궁금하지 않은가? 과거의 나는 호기심 가득한 열정과 욕심이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질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한국 유학생들의 문제(117p)
문제를 구체화(specific) 하지 않고 일반화(generalize) 한다는 거야. 큰 이야기들은 다 똑같아. ‘사람이 태어나서 죽었다.’가 전부지. 큰 이야기는 틀린 말이 없어. 지루하지. 차이는 작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 디테일 속에 진실이 있는 거야. '효도해라', '정의를 실천해라' 이런 큰 일반론을 주장하는 건 공허해.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 사르트르도 그랬지. 징집영장과 어머니 부고를 동시에 받았어. 군대에 늦으면 탈영이다. 너는 어머니 장례식에 갈래? 군대에 갈래? 퍼블릭과 개인의 의무가 충돌할 때 어떡할 거냐는 거지.
인간사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네. 케이스를 파고들어 처음에 쉽게 결정했던 일반론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거지. 그걸 깨닫기 위해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거야. 일반론이 진리인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하네.
세계화가 세계화를 막아버린 Covid-19(115p)
인류는 끝없는 재앙 속에서 진화해 왔네. 지금은 21세기니까 그에 걸맞은 글로벌 시련이 온거야. 그런데 이번에는 각 나라 리더들도 합을 맞춘 듯 좀 특이한 사람들이야. 트럼프, 시진핑, 푸틴, 마크롱.. 일종의 동기화(synchronism)라고 봐야 할까. 각 나라가 떨어져 있어도 어디서 혁명 나면, 비슷한 시기에 다른 데서도 일어나거든. 생명이든 문명이든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 우리는 거기에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맞춰서 흔들거리고 있는지도 몰라.
무문석과 화문석(179p)
강화도에서 무늬가 없는 무문석을 달라했는데 화문석보다 비싸다는 거야. 그래서 따졌네.
"어째서 손도 덜 가고 단순한 무문석이 더 바쌉니까?"
- "화문석은 짜는 과정에서 무늬 넣을 기대감이 생기고 신이 나서 짜는데 무문석은 오로지 완성을 위한 지루한 노동이요."
변화가 없으니 더 힘든 거야. 인생도 그렇다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내 인생이 무문석이 될지 화문석이 될지.. 그 차이는 리빙과 라이프야. 의식주와 진선미지. 월급 더 많이 받고, 자식이 더 좋은 학교 가고.. 이게 목적이 되면 그건 리빙이야. 진선미에서 오는 기쁨이 없지. 그러니까 돈은 더 벌지 몰라도 인생이 내내 고된 거야. 진선미를 아는 사람은 밥을 굶어도 웃는다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식사도 자는 것도 잊어버려. 의식주를 잊어버리는 거지. 그게 진선미의 세계고,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다움'의 세계야.
자기 무늬의 교본은 자기 머리에 있어.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 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