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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 류시화(여행길에서)

여행지를 오가는 이동시간에 책장을 넘겨볼까 하는 마음에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6개월 만에 다시 펼쳐본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비행기와 배로 이동하기 전 대기 시간에 서로 다른 주제의 짤막한 산문들이 읽기에 좋았다. 휴양지의 여유로움을 배경으로 평소와는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고, 처음 읽었을 때에는 놓쳤던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여행하는 법을 배운다는데.. 닫힌 나의 마음은 아직 쉽게 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지 않은 일(122p)

해 버린 일이 대한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지만,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생의 저녁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하지 않은 일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시키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삶인데도.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뒤로 미룬 일,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은 감춘 일
 

옷처럼 다양한 삶을 입어보고 어떤 옷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지 알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 실비아 플라스 (192p)

모든 열매를 원하는 것은 생의 시작에만 가능할 뿐 머지않아 선택을 내려야만 할 때가 다가온다. 결정을 미루는 것이 두려움 때문이든 더 멋있어 보이는 다른 삶을 포기하기 싫어서든, 열매를 비교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빠르게 나이를 먹고 그 미래들은 하나씩 검게 변해 발아래로 떨어진다.
내가 선택한 이 길, 나에게 손짓하던 그 많은 무화과 중에서 이 열매가 나에게 최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배를 끝까지 타고 가서 목적지를 확인할 것이다. 내일은 내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실함이다. 어차피 나는 죽음에 패배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아름답게 패배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일이다.

 

어차피 죽음에 패배할 것이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이 최선의 성실이자 아름다운 패배일까? 이것이 살아야 할 이유일까?

 

보이지 않는 스티커를 등에 붙인 고독한 전사(48p)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삶을 경험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운전해서 가는데, 앞에 가는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이어서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를 내지 않는 차를 만났다.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찰나,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자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도 사라졌다. 오히려 그 차와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약속 장소에 몇 분 늦게 도착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왜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각자의 등에 붙어있는 투명한 스티커를 알아보지 못한 채 성급히 판단하는가?
- 병과 싸우고 있어요
-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요
- 그저 껴안아줄 사람이 필요해요
- 방세를 못 내고 있어요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스티커를 등에 붙인 고독한 전사이다. 그 등은 어떤 책에도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고 다닌다.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참고' 친절해야 한다.

 

처음엔 그냥 뻔한 이야기라고 느꼈었는데, 나의 일상에 조급함과 화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화를 유발하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나는 알지 못한다. 화가 나고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기준에 그들이 부합하지 못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호흡을 한번 비워내고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254p)

저자와 친구가 처음으로 경양식 집에서 외식을 할 때 오므라이스를 주문하고는 메인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수프만 맛보고는 적은 양과 맛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가게를 나왔던 일화를 소개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평생 에피타이저만 먹으면서 “내가 상상한 음식이 아니야.” 하고 불평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아직 앞에 나타나지도 않은 메인 요리를 저평가하며 좌절과 실망 속에 너무 일찍 포기하는지도. 그래서 자신이 삶에게 기대하는 것뿐 아니라 삶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까지 부정하면서 희망과 화해하기를 거부하는지도. 자신을 위해 신이 준비한 멋진 메인 요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메인 요리를 맛보고 있을까?

 

84번째 문제 - 붓다(250p)

모든 사람이 각자 83가지의 문제를 갖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열심히 노력하면 한두 가지는 바로잡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 문제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84번째 문제 때문이다. ‘모든 것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대가 ‘문제를 발견하는 문제’를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난다면 83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벗어날 수 있다.
삶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다면 혹시 뛰어난 문제 발견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보다 문제를 발견하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있기 때문에?

 

삶의 아름다움.. 내가 놓치고 있는 삶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나는 여행(239p)

드문 기회를 얻어서 온 여행을 실패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인생에 남는 여행이 목표일 것이다. 훗날 자신의 여행을 뒤돌아볼 때 망설이며 시간을 보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여행이 불완전한 자유라 불리는 이유는 여행은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길들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실패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여행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사는 법을 배우고 여행해 나가면서 여행하는 법을 배운다.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앨리스는 토끼 굴 속으로 추락해야 한다.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만날 때면 마음이 급해지고 사전에 알아보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하며 화가 난다. 여행해 나가면서 여행하는 법을 배운다는데, 나는 새로운 배움에는 닫혀 있는 걸까?

 

예민함 -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자(31p)

예민한 사람일수록 싫어하는 것이 많다. 우리가 천성적으로 부여받은 예민함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자기 주위에 벽을 쌓는 쪽으로 그 재능이 사용되어선 안 된다. 우리를 상처 입히고 고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예민함이 아니라 그 예민함으로 발견하고 선택하는 것들이다.
예민한 영혼으로 태어난 것은 신의 실수가 아니라 축복이다. 관계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예민함은 바로잡아야 할 심리 상태가 아니라 특별한 재능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다른 이들이 놓치는 현상의 이면을 보고, 울림 있는 내면세계를 가지며, 문학과 예술에 감동받는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뛰어난 감응력을 갖는다. 예민한 사람은 그 예민함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지만 그 예민함 덕분에 세상을 더 심층적으로 바라본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꽃이 보인다 - 화가 앙리 마티스
 
당신은 싫어하는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은가.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무엇으로 나다움을 만들어나가고 있는가? 잠시 방문한 이곳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세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아야 한다.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나에게 숙제를 남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을 위해 놓치고 있는 삶의 아름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당분간 이것들을 찾기 위한 시간을 조금씩 마련해 보자.